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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의 등가성'만으로는 지역 지킬 수 없다

작성자 :
의정홍보담당관실
날짜 :
2025-11-18

최근 헌법재판소가 전북 장수군 도의원 선거구가 인구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장수군 인구(2만1,756명)가 도의회 평균 선거구 인구(4만9,765명)의 절반에 미치지 못한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결정이다. 모든 유권자의 한 표가 동일한 가치를 가져야 한다는 ‘표의 등가성’ 원칙을 강조했지만, 지역소멸이라는 위기를 겪고 있는 농산어촌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결정이어서 개선책이 시급하다.

인구 비례라는 원칙만을 기계적으로 적용할 경우, 지방의 대표성과 지역자치의 본질을 심각하게 훼손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헌재의 결정이 지역 대표성의 가치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는 전문가들의 비판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 농산어촌 지역은 인구 감소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지속적 추세로 이어지고 있다. 행정구역은 그대로지만 인구는 급격히 줄고, 고령화는 심화되고 있다. 여기에 면적은 넓지만 교통 접근성이 낮고, 읍·면 단위 생활권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특성은 도시 지역과 완전히 다른 행정 수요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인구 기준만으로 선거구를 재편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첫째, 광범위한 농촌 지역 전체를 하나의 선거구로 묶는 일이 발생한다. 이는 지역민이 도정과 정책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를 사실상 봉쇄하는 것과 다름없다.

둘째, 지역의 실질적 필요와 생활권을 반영하지 못하는 ‘의석 축소·흡수 통합’이 빈번하게 나타나며, 그 결과 농촌 지역에서는 도의회와 중앙정책에서 자신의 의견을 낼 대표가 사라진다.

셋째, 결국 지방소멸과 인구 유출의 악순환이 가속된다. 대표가 없는 지역은 예산·정책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인구 숫자만으로는 농촌 지역 주민 삶의 실체를 온전히 반영할 수 없다. 그럼에도 현행 공직선거법은 인구 비례 기준을 절대적인 원칙처럼 규정하고 있고, 헌재 또한 이번 판결에서 인구 원칙을 우선순위에 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헌재도 결정문에서 “인구가 적은 지역의 대표성 보장 역시 간과할 수 없다”고 언급하며 보완 필요성을 분명히 했다.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핵심은 두 가지다. 하나는 표의 등가성, 또 하나는 지역 대표성이다. 표의 가치가 동일해야 한다는 원칙은 당연히 중요하다. 하지만 지역마다 인구 규모가 극단적으로 차이 나는 나라에서 ‘숫자 절대 기준’만으로 모든 선거구를 재단한다면 민주주의는 평등을 확보하는 대신 균형과 다양성을 잃게 된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수도권 집중이 극심한 나라에서 인구 기준만으로 선거구를 획정한다면, 지방자치의 뿌리는 약해지고 지역 균형발전이라는 국가적 목표는 실현될 수 없다. 지역 대표성이 사라진 곳에서 누가 지역의 미래를 책임질 것이며, 누가 지역민의 삶을 대변할 것인가.

결국 이번 장수군 판결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인구 감소 지역의 주민의견을 누가, 어떻게 제도적으로 보장할 것인가?”

장수군 사례는 특정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국의 많은 농산어촌 지방이 이미 인구 기준 하한선에 근접해 있으며, 앞으로 더 많은 지역이 동일한 문제에 직면할 것이다. 국회가 공직선거법을 개정하지 않는다면 지역 대표성의 붕괴는 구조적 현상으로 굳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공직선거법은 인구 수치만을 기준으로 선거구를 나누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먼저, 인구 외의 다양한 지표를 선거구 획정 기준에 적극 포함해야 한다. 단순한 인구 비례가 아니라 지리적 여건, 생활권의 범위, 행정구역의 연속성, 교통 접근성 등 주민의 실제 생활을 반영하는 요소들이 균형 있게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들을 반영해야만 해당 지역 주민의 삶과 행정 수요를 제대로 포착할 수 있다.

나아가 인구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지역에 대해서는 대표성을 보정할 수 있는 장치를 제도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인구 감소라는 구조적 현실을 고려해 일정한 기준 이하의 인구를 가진 지역이라도 최소 한 명의 대표를 가질 수 있도록 의석을 보장하는 방식은 충분히 현실적이며 검토할 만한 대안이다. 지역 대표가 완전히 사라지는 사태는 지방자치의 기능을 약화시키고 지역민주주의의 기반을 흔들기 때문이다.

또한 지방소멸위기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특별 선거구 제도를 도입하는 방안 역시 적극 검토해야 한다. 지역 대표성을 보장하지 못하면 지역 균형발전은 불가능하고, 국가 차원의 지방소멸 대응 전략 역시 성과를 낼 수 없다. 인구 감소 지역의 대표성은 단순한 선거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지속가능성과 직결된 과제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공직선거법 개정 방향은 결코 특정 지역을 위한 특혜가 아니다. 이는 대한민국 전체의 지방균형발전과 민주주의의 지속 가능성을 동시에 확보하기 위한 국가적 책무에 가깝다. 지역의 대표성과 인구 비례 원칙을 조화시켜야 하는 지금, 국회는 더 이상 이 문제를 미룰 수 없다.

박용근 전북특별자치도의회 의원 / 새전북신문.2025.11.1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