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치지 않는 삶, 그 ‘무성무형(無聲無形)’의 미학
- 작성자 :
- 의정홍보담당관실
- 날짜 :
- 2026-02-11
풍요의 계절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늘 무언가를 채우려 애쓴다. 옛말에 ‘광에서 인심 난다’고 했다. 곳간의 곡식이 차고 넘쳐야 비로소 이웃을 돌아볼 여유가 생기고 인심도 넉넉해진다는 뜻이다. 이러한 풍요의 넘침은 나누어 가질 수 있기에 미덕이 된다. 그러나 세상 모든 넘침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술잔을 채우다 못해 넘쳐버린 술을 보라. 한번 잔을 넘쳐 바닥으로 쏟아진 술은 아무리 애써도 다시 술독에 담을 수 없다. 그 넘침은 되돌릴 수 없는 과오이자, 제어하지 못한 욕망의 흔적일 뿐이다. 그래서 선인들은 ‘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과유불급·過猶不及)’고 경계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종종 일상을 무책(無策)하게 맞이하며, 욕망과 감정의 넘침을 간과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필자는 오늘, 이 넘침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로 ‘무성무형(無聲無形)’이라는 화두를 꺼내 들고자 한다.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다’는 뜻이다. 본래 이 말은 유교 경전에서 부모를 섬기는 지극 정성을 설명할 때 쓰였다. 부모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달라고 말하기 전에(소리 없는 곳에서 듣고), 안색이나 형체가 드러나기 전에(형체 없는 곳에서 보고) 그 뜻을 미리 헤아려 편안하게 해 드리는 것이 참된 효도라는 의미다. 하지만 오늘날 이 가르침은 비단 효(孝)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복잡다단한 현대 사회의 인간관계와 삶의 태도전반을 관통하는 깊은 철학적 울림을 준다.
주위를 기울이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살필 수 있고, 들리지 않는 마음의 소리까지 헤아릴 수 있다는 ‘섬세한 배려’와 ‘겸손한 살피임’의 미학이 바로 무성무형이다. 우리는 너무 시끄럽고 형체가 뚜렷한 것들에만 매몰되어 있다. 나를 드러내고 과시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고 믿는 강박 속에 산다. 그러나 지나친 자기 과시는 오히려 타인의 냉소와 피로감을 부른다. 향기가 너무 짙은 꽃은 그 진가를 잃고 오히려 사람을 멀어지게 하는 법이다. 은은하게 배어 나오는 향기가 발길을 오래 머물게 하듯, 사람의 품격 또한 넘치지 않는 은근함에서 비롯된다.
무성무형의 마음으로 주위를 살핀다는 것은 나의 욕심을 덜어내고 타인을 위한 빈 공간을 마련한다는 뜻이다. 내가 가진 지식, 재물, 혹은 권력을 과시하며 넘치게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적절한 선을 지키며 배려하는 ‘돈후(敦厚)한 인간관계’의 근본이 여기에 있다. 현대인의 불행 중 상당수는 ‘넘침’에서 비롯된다. 시기와 질투, 미움과 증오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은 대부분 내 안의 욕망이 통제선을 넘어 범람할 때 발생한다. 남보다 더 가져야 하고, 남보다 더 돋보여야 한다는 강박이 스스로를 갉아먹는다. 술잔이 넘치면 술을 버리듯, 감정이 넘치면 관계를 버리게 된다.
이제 우리는 일상에서 무성무형의 실험적 가치를 피워내야 한다. 늘상 마주하는 가족, 동료, 이웃과의 관계에서 나의 언행이 과하지 않은지, 나의 주장이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지 소리 없이 살피고 형체 없이 배려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진정으로 넘쳐야 할 것은 딱 하나, 사람을 향한 따뜻한‘인심(人心)’뿐이다. 그 외의 모든 것, 특히 과시욕과 이기심, 분노와 같은 감정들은 철저히 절제되어야 한다. 80% 정도만 채워졌을 때 멈출 줄 아는 ‘계영배(戒盈杯·가득 참을 경계하는 잔)’의 지혜가 절실한 시점이다.
삶의 획을 긋는 과정에서 힘을 빼고 여백을 남기는 것, 그것이 명필의 조건이듯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다. 꽉 채워 넘치게 하기보다는, 조금 비워둠으로써 오히려 넉넉해지는 삶. 보이지 않는 곳을 살피며 넘침의 선을 지키는 무성무형의 자세가 우리 사회를 한층 더 품격 있고 따뜻하게 만들 것이다. 오늘 하루, 당신의 잔은 어떠한가. 혹시 욕심으로 찰랑거리고 있지는 않은지 조용히 들여다보기를 권한다. 넘치지 않아서 더욱 아름다운, 여백이 있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한다.
김희수 전북특별자치도의회 부의장 / 전민일보.2026.2.11.(수)
- 누리집 담당부서
- 의정홍보담당관실
- 연락처
- 063-280-318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