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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봉사단과 UNV 이후에 뜻하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

작성자 :
박○○
날짜 :
2026-01-27

해외봉사단과 UNV 이후에 뜻하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

by
박향선


해외봉사단과 UNV 이후에 뜻하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
서로 도와야 하지 않겟씁니까어려울 때는 말입니다. 이해타산적인 이권에 끼어 들고 싶지는 않은데

26.01.27 0714l

박향선na4amich



.난 방글라데시에서 한국청년해외봉사단을 돌아온 후 적립금을 어머니가 남동생 결혼을 위해 쓰자고 해서 그런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때 대학원을 가고 싶었었다. 봉사단활동을 하면서 NGO의 커다란 세계을 알게 되었다.그런데 UNV을 코이카에서 추천을 해주고 UNV지원서와 추천서을 받으라고 보내왔다. 남동생 결혼식은 내 통장이 깨지면서 진행되었다.어머니는 축의금 받으면 돌려주겟다고 했지만 안그랬다.큰 올캐는 포천 사람이다.남동생은 처가가 있는 포천의 오비배어스 타운도 다녀오고 했다고 했다.

유엔브이로 부탄을 다녀오고 대전에 있다가 서울에 올라가 월간지나 주간지에서 일하면서 외국인무료진료센타에서 자원봉사을 했다.거창하게 한 것이 아니라 서울 혜화동 동숭동에 동성중고등학교 강당에서 이주일에 한번씩 열리는 곳에 이주에 한번씩 하는 봉사활동이었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방그라데시 개발협회에서 파견선교사로 있던 부부가 포천에서 외국인 상담센타인가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남자는 이석봉선교사였고 여자는 부모님이 외국에서 선교사을 오래동안 하신 분이라고 했는데 의류분야 였다.방글라데시 언어을 일년정도 공부하고 의류봉제 센타을 열어 방글라데시 사람들을 가르친다고 들엇었는데 포천에서 외국인상담센타을 한다고 해서 의외 였다.

포천에을 갈까하다가 안갔다. 너무 멀고 이제와서 방글라데시 갔다 왔다고 찾아가는 것도 그렇고
나중에 이야기을 들으니 방글라데시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회사에 파견나갔다오고 정부기관에서 파견되었던 사람들과 모임이 있다고 봉사단 동료인가 후배에게서 이야기을 들었다.아마 방글라데시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한인교회에 나갔던 후배들이나 동기에 의해서 들었던 것 같다.

내 큰 올캐는 나중에 언뜻 들으니 술집을 한다는 이야기을 들었다. 이혼을 한 줄알고 조카들을 돌보앗는데 나중에 조카고등학교때 남동생에게 이혼서류을 들이밀었다고 한다오랜 시간 별거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큰 올캐가 술집을 시작하면서 애들이 거지 같이 밤늦게 밖으로 돈다고 어머니가 애들을 데려 오?서 집에서 두 조카을 데려다 길렀었다.여자조카가 초1때였던가 초2때다.아침도 안차려줘서 여자조카가 챙겨서 먹고 학교을 갔다고 이야기 했다.

예전에 언뜻이야기 들으니 자기 큰 오빠가 경주에서 사업을 하는데 지기 올캐가 너무 빡빡하다고 이야기 하고 우리집에서 자기을 잘 챙겨주서 고맙다는 이야기까지 했었다. 형제중에 여섯쩨 인가 해서 집에서는 관심이 없었다고 ..포천에서 자기 집이 농사을 짓는다고 하고 ..그때는 남동생이 포천에도 왔다갔다 햇다. 형제들이 많아 좋다면서 ...

내가 돌아오고 나서 얼마 안되어 큰 올캐의 세째 언니가 안동인가에서 살면서 이혼을 한다고 남동생이 함께 가서 컴퓨터 한대와 그 언니와 국민학교 5학년여자애인가 남자애을 대리고 대전에 좁은 아파트에 와서 같이 살앗다 중촌동에 주공아파드로 작은 평수였다.그런데 어떻게 된 것인지 남동생은 밖으로 나돌았다고 한다. 큰올캐에 의하면 내 남동생이 집을 잘 안들어온다는 것이다.일도 잘 안나가고 없어지고 말이다. 그러다 별거을 햇다.아파트 임대비등은 한참 밀리고 살림살이도 그대로 있어서 엄마가 나중에 가서 치웠다고 한다.난 그때 이혼한 줄 알았다. 어머니에게서 이야기만 들었었다.

그리고 남동생결혼식에 알게되었는데 큰 올태 부모와 강원도가 고향인 작은 어머니와 큰 올캐는 친척이었다고 한다. 겹사돈인것이다.내가 이야기을 들엇는데 작은 머머니는 나에게 이야기 한적이 없다.작은 어머니는 강원도 동네에 살던 미국평화봉사단 이야기만 했었다.

애아빠는 드라이브을 하면서 경주을 자주갔다.그리고 포항호미곶까지 차을 드라이브을 했다.내가 부탄을 가기전에 신림동 요셉의원에서 외국인무료진료보는데 자원봉사활도을 하자 코바 3기 김미행씨가 서울에 있는 가나안 농군학교에서 운영하는 송파구인가 강동구에 있는 교회을 데려가서 나보고 나오라고 해서 한두번 갔었다.한국에 가나안농군학교는 경주어딘가에 근처에 있는 것으로 안다.

방글라데시개발협회는 가나안농군학교와도 관계가 있고 서울대을 나온 권씨 성함의 가진 선교사가 라즈샤히의 근처 에서 가나안농군학교인가 농촌개발사업을 하신다고 들었다.방글라데시의 국회의원들도 참여한다는 이야기도 말이다.
그리고 우리 한국청년해외봉사단들이 방글라데시개발 협회을 방문했을떼 방글라데시 개발협회을 만든 방글라대시 정보에 대한 책자을 주었었다.그리고 처음에는 봉사단을 파견하게 된 것이 이 선교단체에 의해서 인줄알았다. 물론 도움이 됐을 것이다.

한데 한국청년해외봉사단이 파견이 되고 6개월인가 지나서 농업성인 카마르 바리에 갓는데 한 국장이 그랫다. 너희들을 부른 것은 자기 라고 했나농업성과 치타콩에 영원무역이 힘을 썼다고 햇다.농업성 관리들고 영원무역과 식사도 하고 했다고 이야기을 하셧다. 깜짝 놀랫다.

이런 생각도 해 본다. 이제 내가 봉사단을 다녀온지 30년이 넘었는데 누군가 나을 사칭했다면 어쩌면 큰 올캐와도 상관이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지지난해에 사업자 등록증을 만들고 부가가치세 신고을 하는데 인터넷에서 내 주민번호을 넣고 하는데 잘 안되었다. 나중에 주소가 뜨는데 태평동이 아닌 중촌동어딘가가 떴다. 내 남동생과 큰 올캐가 살던 아파트가 중촌동이다. 한데 세무서는 잘 모른다고 했다.자꾸만 엉뚱한 이야기만 하고 세무서직원들도 사업자등록증에 코드 내는 것에 대해서 잘 몰랐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내가 브런치 스토리에 방글라데시 파견 30주년 글을 쓰면서 와디즈에서 펀딩을 받아서 출판을 하려고 알아보는데 너무 복잡했다.나는 원고만 제출하면 되는 줄 알아서 원고을 마감에 맞추어 제출했다. 한데 그것이 아니다. 출판사 등록증과 앞표지 디자인ISDN출판번호그리고 통신판매증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는데 여동생에게 출판사 등록증을 이야기 하니 거절했다.마감을 연기 해주었는데 막막강산이었다. 결국은 포기하고 딸이 대입을 위해 혼자서 공부한다고 해서 뒷바라지만 하게 되었다. 그래 봤자 딸을 독려하고 밥을 챙겨주는 일이었다.학원을 가라니 안간다고 했다이제 대전중구청에 지난해에 만들었던 통신판매증을 받으로 가야 겟다.

대전이슬람센터에 가서 이맘과 이야기 하고 그 일층에 식당에서 방글라데시에 대해서 이야기을 들으니 대전외국인복지회관에 방글라데시가 백명이 있다고 한다.한데 그때 무릅이 아프는 퇴행성 관절염이 오고 아팠다. 혈압이 오른것인지 두통도 오고 지난해 겨울에서 봄에 걸쳐 죽을 뻔 했다.
그와중에 외국인근로자와 유학생들을 위해서 대전에 위치한 크라운제과 방문프로그램을 작성해 대전의 대학가 한국어 교육원과 국제 협력실에 이메일로 서류을 보냈는데 아무 대답이 없었고 크라운 제과에 방문프로그램 관련자들은 외국어로 홍보을 해 줄수 없다고 전화상으로 이야기 했다

내가 왜 크라운제과에 방문프로그램을 했냐면 6년전에 크라운 제과의 공장에 가서 하루 일을 했다.그때 회사사정이 안좋다는 이야기을 들었다. 계속 공장을 돌릴 수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공장에 알바을 하러 온 사람들은 학원 선생도 있었고 다양한 경험을 하고 있었는데 과거의 공순이 들이 아니다. 요즘은 공장들이 월급도 일정하고 점심도 나오고 일반인들도 많이 지원해서 한다.대전에는 세계과자할인점이 있고 큰 마트에서는 태국과자가 매장에 쌍하놓고 팔리고 있고 문방구점에는 작게 포장되서 파는 인도네시아 감자 칩등이 팔리고 있다.

나는 애기을 키우면서 분유등에서 고객들을 위해 무료로 공장을 견학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과자회사도 말이다. 일반 기업체도 무료로 공장 견학프로그램을 운영을 한다.
일반 외국인근로자들은 이런 우리나라의 각종 기업 견학프로그램에서 운영하는 기업체 방문프로그램을 모른다. 아니 갈 기회가 없을 지고 모른다.딸이 어렸을 때 크라운제과 견학을 다녀오며 과자선물세트도 받아 왓었다..

외국에서 한국을 방문하는 기업이나 공무원들에게만 우리나라 기업의 견학프로그램을 할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와 유학생들에게 이들 공장 견학프로그램을 하고 싶엇다. 참고로 나는 주간지 월간지에서 기업탐방 기사을 쓰기도 했다.난 방글라데시을 나가기전에 부천에 어느 공장에 갔다가 그때 당시에 한국에 들어와서 일하던 방글라데시 근로자을 만나기도 했다.의회타임즈이던가

우리아버지는 대전의 강창희을 지원하던 분이었는데 나와 대립했었다. 대학생때 ..우리는 김대중선생을 높이 평가하고 나는 데모에 열심히 참가했었다.아니 우리과나 농대가 좀 그렇다. 농민운동도 예전에는 많이 해서 문화동캠퍼스에서 유성궁도으로 이사할때 아예 농대을 한쪽으로 떼어 놓았다고 한다. 그때 당시에는 서문이 정문이었는데 농대까지 갈려면 아리랑공개을 넘어 30분을 걸어야 했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이 유성시장쪽에서 마을에서 운행하는 봉고버스을 많이 탔다. 그때 KAIST생도 타고 다녔다. 농대 뒷쪽에 카이스트가 있었따. 국민학교 동창을 만나기도 했다. 그때 내가 데모대을 쫓아다녀서 얼굴이 탔었다.

그런데 한국해외봉사단을 갓다오면서 우리나라의 근대화을 이끈 사람들을 좀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민주당도 보면서 다른 건너편 당도 보게 되었다.방글라데시는 상대편 당수의 기념관도 잘 되어 있고 한국처럼 싸우지 않는다. 박정희 기념관이 열기도 전에 그렇게 되서 마음이 아프다.그래서 정치적으로는 방글라데시나 인도에서 배울 점도 많은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방글라데시 해외봉사단을 다녀와서 서울 종로의 헤화동에 있는 이승만 집인 이화장인가을 여러번 찾았다. 기념관도 둘러보았었다. 어려서 이승만 전기 책을 잠깐 읽기도 하고 나에게 침을 뱉으라는 박정희 책도 언뜻 읽었던 것 같다. 어머니가 보았던 책이다.어머니는 서울에서 우리가 잠들면 잠이 안오면 삼국지을 읽으셨다고한다. 누군가가 이야기 해주었다고 한다.그때 아버지가 우리집에 없었다.나는 아버지의 커프스을 기억한다. 지금은 커프스가 귀금속점에서 팔지 않는다. 그리고 방송에서 기업인들이나 정치인들을 보아도 커프스을 하고 나오는 사람들이 ?지가 않다.

며칠전에 여동생이 자기가 살던 집을 빼서 어머니가 돌아가셧다고 돈을 나누자고 한다. 병원비 한다고 했는데 ...나보고 인감증명서을 가져오라고 했다. 나는 인감증명서을 만든적도 없고 더군다나 그 증명서에 찍힌 동그란 도장을 나는 모른다.누가 만든것인가

어머니는 대전시민대학을 다니면서 어떤 아줌마을 만났는데 사위가 목사이고 개척교외을 만들었다고 같이 가자고 햇다고 한다. 그전에 그 아줌마와 여러번 식사을 했다고 한다. 어느날 중구청 옆에 민영빌딩에 지하에 있는 뷔페집에서 식사을 했다.민영빌딩에는 내가 고등학생때 중도일보가 있던 자리다.

대전인터넷신문에서 일을 할때 대전시청을 나가서 중도일보을 유심히 읽은 이유중에 하나 이다.
대전은 보니 일간지 기자는 신문사에 앉아 있어도 기업이나 소스원들이 자료을 가져다 주어서 앉아서 일해도 기사가 잘 나온다. 그런데 작은 신문사는 소스원이 있는 먼곳까지 가도 자료을 잘 주이 않는다.난 한동안 어려서 기자생활 할때 취재가 힘들어서 한국소비자보호원에 보도자료을 리라이팅을 하기도 했다.

방글라데시 소요사태가 진행되면서 갑자기 코바 3기 김미행이 전화해서 내 주민번호도 묻고 전화연락하더니 그다음에는 연락이 없다. 내가 부산에 내려갓는데 동기가 코바 사무국장으로 있었는데 갑자기 부산에서 서울 국회의사당까지 오라고 연락이 왔다. 서울에서 코바가 세미나을 연다고 말이다. 그전에 나는 코바 총회에서 선배들고 동기와 후배들이 사무국장직을 맡아 달라고 했는데
집의 형편이 그럴 정도가 안되었다.대전에 근거지라 서울 가려면 집도 얻어야 하고 정장도 필요하고 할 것이 많았다. 그리고 조카들이 아직 어려서 어머니 혼자서 돌보시지 못하셧다. 여자 조카들이 국민학교 4학년이었는데 어머니가 무척 힘들어 하셨다. 조카 세명을 우리 부모님과 보는데 큰 올캐은 얼굴도 안비치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밖에서 애들과 만나지는 안았나 생각이 든다.

에전에 코바의 선후배들이 돈을 얼마씩 걷어서 사업을 한다는 소리을 들었다. 어떤 사업인지는 이야기을 듣지 못했다. 나는 돈이 없으니 사업하기도 힘들었으니 말이다.

문제는 방글라데시 소요 사태도 고속도로가 막히지 않앗나 싶고 방글라데시 항구도시치타콩에서 컨테이너가 움직이지 못한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치타콩에서 컨테이너가 방글라데시을 통해 부탄과 인도 아샘지방인 구와하티그리고 네팔까지 간다. 그리고 캘커타에서도 간다.. 당시 인터넷에서 보니 공항은 마비가 되고 다카시내는 버스가 불타고 청년들이 총상을 입은 사람들이 많아서 방글라데시 에이드에서는 치료비을 원조받는 기금을 구하고 있엇다. 그래서 외국인들이 걱정이 되서 이테리아 대사관에 라지샤히 북쪽 이탈이라 공동체 이야기을 하면서 방글라데새 다카 외국인들이 어디로 피햇을지 걱정도 되엇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는 다카시내권의 통용되는 은행돈과 지방에는 다른 돈이 통용된다. 은행권이 달라서 지방으로 피신을 해도 현금때문에 문제고다른 나라로 갔다고 하더라도 부탄은 외국인들에게 일일 체류경비가 내가 있을때 200달러정도 되었다.구와하티도 공항이 패쇄 되엇던 것으로 안다. 이들을 위한 한인대책도 마련되어야 했었는데 대사관의 홈페이지도 운영이 안되고 한국에 방글라데시 대사관도 전화도 안받았다. 계룡건설은 자료실인가에 전화해 방글라데시 지도을 물으니 모른다 했다.

내가 킹덤이라는 뷔페에서 일을 할때 보니 그 근처에 계룡건설이 있었고 그 옆에 고용노동청이 있었다. 부탄에서는 대전에서 한국과 부탄 30주년 협정 행사을 열고 방글라데시 여자대사는 방글라데시 소요사태 1년전에 대전상공회의소을 다녀갓다.

그리고 방글라데시 소요사태 전에 뱅갈리 부부가 대전시내 버스에서 애기을 안고 있으며 뱅갈리 이야기 하던 모습이 생각이 난다. 그리고 근래들어 인터넷에서 자료을 보니 우송대학에서 방글라데시 인 500명이 모여서 체욱대회을 했다고 한다.

우리 봉사단중에 동기하나가 가지 푸르에서 뱅갈리 데시 인력중개 업을 하는 부로커을 만났다는 이야기을 한적이 있다. 최근에 동기을 만났는데 모두들 자기 일을 하느라 바빠서 코바에 관련된 일을 안한다고 했다. 초창기 코바는 봉사단 인원들을 뽑기가 어려워서 KOICA직원들의 친척들을 동원햇다고 한다.

우리어머니는 예전에 대한가족계획협호에 다니실때 그곳에서 진행하는 청소년 성상담 전화자원봉사교육에 인원이 많이 않다고 나보고 참석해 달라고 해서 그런 적이 있다.

여기에 나는 대전교육청 다이어리을 부탄에 살때 집주인 딸에게 보냈다. 인도에서 공부을 햇는데 부탄에 오면 자동차로 레디오 스테이션까지 드라이브을 시켜주고 자신의 친구들이 여는 파티에도 데려갔었다.어린애들 파티다. 그리고 나에게 동부탄언어인 샤숍어을 가르쳐 주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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