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회군
- 작성자 :
- 의정홍보담당관실
- 날짜 :
- 2026-08-24
지난 8월 1일, 지리산 무박종주에 나섰다. 중산리에서 성삼재까지 34km, 정읍마라톤협회와 오솔길 시민순찰대가 함께하는 연례행사다. 통상 2박 3일이 걸리는 코스를 밤낮없이 걷는 결코 만만치 않은 여정이다.
지리산은 내게 단순한 산이 아니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품은 남한 내륙의 최고봉이자 해방 전후 민족의 희로애락이 서린 역사의 현장이다. 10여 년 전 안재성 작가의 『이현상 평전』을 읽고 홀로 무박종주에 나선 이후 지리산과 인연을 이어왔다.
정치는 무엇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기 위한 책임의 과정이다.
장터목에서 아침을 먹고 세석평전을 지나 벽소령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오후 5시경 연하천에 도착하자 한 대원이 말했다. “의원님, 이 속도라면 성삼재에는 오후 8시쯤 도착할 것 같습니다.” 1진은 이미 종주를 마쳤고 우리 3진도 완주 의지가 강했다. 노고단과 성삼재가 지척이었다.
그러나 결단해야 했다. 개인의 완주보다 함께 걷는 이들의 안전과 동행이 먼저였다. “아쉽지만 여기서 음정마을로 회군합시다.” 그렇게 27km 지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산길을 내려오며 문득 ‘위화도 회군’을 떠올렸다. 1388년 이성계는 압록강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렸다. 그 역사적 평가와 의미는 다양하지만, 목표를 향해 무조건 전진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교훈을 준다. 때로 물러섬은 패배가 아니라 더 큰 전진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다. 처칠은 “개선하려면 변해야 하고, 완벽해지려면 자주 변해야 한다”고 했다. 방향을 바꿀 용기 역시 지도자의 중요한 덕목이다.
더불어민주당 당대표와 최고위원 선출을 위한 대장정이 끝났다. 치열한 경쟁 끝에 김민석 후보가 당대표로 선출됐다. 필자 역시 그 과정에서 “지금은 선수 교체의 적기”라고 주장했다. “이길 곳을 졌으면 성공했다고 볼 수 없다”는 이재명 대통령의 지방선거 평가 역시 정치의 책무성에 대한 엄중한 요구다. 정치의 생명은 책임에 있다. 책임질 때 신뢰가 생기고, 신뢰가 있어야 다시 전진할 수 있다.
이제 화합의 시간이다. 이번 당내 선거에서 표출된 치열한 논쟁과 갈등은 분열의 시작이 아니라 더 큰 단합으로 가기 위한 성장통이어야 한다. 경선 과정에서 만들어진 관심과 참여, 이른바 ‘컨벤션 효과’를 이제 민생과 지역발전의 동력으로 전환해야 한다. 갈등이 분열로 남으면 상처지만 화합으로 승화되면 자산이다.
특히 이번 과정에서 다시 확인한 것이 호남 민심의 전략적 힘이다. ‘약무호남 시무정치(若無湖南 是無政治)’. 호남을 빼놓고 대한민국 정치의 흐름을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 증명됐다. 전북을 비롯한 호남의 선택은 특정 인물에 대한 단순한 지지를 넘어 변화와 책임을 요구하는 시대정신의 표현이다. 호남 민심이 정치의 방향을 물었다면 이제 정치는 성과로 답해야 한다.
맹자는 “천시는 지리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만 못하다(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고 했다. 지금 민주당에 가장 필요한 것은 인화다. 치열하게 경쟁했지만, 이제는 손을 맞잡아야 한다. 새 지도부 출범을 전북 대도약의 호기로 만들고, 전북의 현안을 대한민국 성장과 균형발전의 국가적 의제로 끌어올려야 한다.
연하천의 차가운 샘물이 벌써 그립다. 눈앞의 성삼재를 두고 발길을 돌렸지만, 그날의 지리산 회군은 패배가 아니었다. 모두가 함께 다시 걷기 위한 약속이며, 새로운 전진의 출발점이었다.
염영선 전북특별자치도의회 기획행정위원장 / 전북일보.2026.08.20.(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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